사무실 책장 정리를
시작해 이제는 거의 모든 책을 빼냈습니다.
이번에는 과감히 비워내리라 다짐하며 500여 권을 처분했지만, 여전히 많은 책이 남았습니다. 결국 창고를 빌려 남은
책들을 임시로 옮겨두었습니다.
다시 펼쳐보지 않을 것 같으면서 도 막상 버리려니, 사방을 책으로 가득 채우고 사다리에 올라가 맨 위 칸의 책을 꺼내 읽겠다던
오래전 웅대했던 꿈이 떠올라 차마 버리지 못합니다. "책은 절대 구기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던 외삼촌의 말씀 때문에, 저는 책을 읽을 때 모서리를 접거나
낙서를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밑줄을 치거나 여백에 메모해 두지 않은
것이 못내 후회됩니다.
다시 책을 집어 들어도 언제, 어떤 마음 로 읽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어느 페이지 즈음에 무슨 내용이 있었는지
생생히 기억했었는데 말입니다. 때로는 어떤 물건을
왜 간직했었는지조차 가물가물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 사무실 벽에 걸린
것들에는 저마다의 귀한 사연이 배어 있습니다.
치매를 예방하시 겠다며 고(故)
김순성 사모님이 하나하나 맞추신 1,000피스 퍼즐, (고) 한영란 권사님의 자폐증
아들이 그려준 그림,
한국으로 돌아가신 박미정 권사님의 그림, 송의학 집사님이
정성껏 새겨 넣으신 액자,
그리고 은퇴하신 아프리카 선교사님이 남기신 선교지의
풍경화까지….
이것들을 어찌해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하나씩 하나씩
제 차로 옮겨 싣습니다. 지난 수요일에는
플로리다에서 박태석 목사가 찾아왔고,
다가오는 3월 초에는 캐나다와 시애틀에서도
오래된 지인들이 방문할 예정입니다.
지난주부터는 예전에 지도했던
청년들이 한 번씩 함께 예배를 드리겠다며 찾아오기 시작했습 니다. 잊지 않고 먼 길을 와준다는 것은, 그들의 마음속에서 저를 버리지 않았다는 뜻이겠지요. 물건은 버릴 수 있어도 사람은 결코 버리지 못하는 법인가 봅니다. 사진 속에 담긴
수많은 추억이 어느샌가 뭉클한 소중함으로 다가옵니다. 어느 집사님이 "인연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오랜 인연이라 생각했는데 그러지
못한 아픔을 표현한 말입니다.
고등학생 시절 평생의 우정을 맹세했던 친구들
중 어른이 되어 계속 만나는 이가 손에 꼽히는 것을 보면, 그 말도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설령 유통기한이 지난 인연이라 할지라도, 마음속에 서로에 대한 감사함과
아름다운 이야기 한 토막이 남아있다면,
다시 마주했을 때 그 얼마나 반갑고
기쁠까요. 이젠 다가올 은퇴의
날에 한국에서,
그리고 미국의 여러 도시에서 저를 만나겠다고 찾아오는, 이른바 '유통기한 지난' 사람들과 다시 만날 생각에 가슴이
설렙니다. 이 땅에서의 만남도
이토록 기쁜데,
하물며 먼저 떠나가신 믿음의 교우들을 훗날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 만날 때는 얼마나 가슴 벅차고 기가 막힐까요. 그때는 늙고 병든 모습이 아니라
가장 온전한 모습일 텐데,
우리는 과연 어떤 이야기꽃을 피우며 천국 잔치에 참여하게
될까요. 오늘은 저의 은퇴를
공식적으로 추인하는 공동의회가 열리는 날입니다.
목회의 자리를 떠나 멀리
가는 것이 아니라,
성도님들의 가슴속에 따뜻하게 남는 인연이기 를 소망합니다. 유통기한이 끝나버린 잊힌 만남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나든 반갑게 지나온
옛이야기를 함께 풀어갈 수 있는 영원한 만남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